[사라진 설계사들①] 준공석에서 흔적 감춘 이름, 법도 소용없는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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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설계사들①] 준공석에서 흔적 감춘 이름, 법도 소용없는 무시
  • 정원기 기자
  • 승인 2025.07.22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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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산업기본법, 준공기념비 설치 명시
“법적 제재 없어 사실상 권고 수준”

편집자 주 : 설계자는 구조물의 안전성과 기능을 책임지는 핵심 주체다. 다만 현장의 상황은 다르다.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은 준공 시 설계자, 감리자, 시공자의 이름을 표시하도록 명시하고 있지만 여전히 설계자의 이름이 빠지는 일이 다반사다. 법이 존재하지만 설계사의 존재는 무시되고, 책임은 전가되며, 공로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의 실태를 알리기 위해 본 기획을 연재한다.

(엔지니어링데일리) 정원기 기자 = 교량이나 철도, 공항 같은 대형 기반시설이 완공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구조물이 있다. 바로 준공기념비다. 현장에 설치되는 기념비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체의 이름을 남겨 신뢰성 확보와 후속 관리가 용이하다.

2013년 건설산업기본법이 개정되면서 건설공사가 완공되면 현장 및 공사정보를 영구적으로 게시해야 한다. 여기에는 공사명과 공사기간 같은 정보는 물론 발주자, 설계자, 시공자 등의 정보도 포함된다.

다만 법이 개정된지 10년이 지났지만 그 취지는 현장에서 무색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 완공된 준공기념비를 살펴보면 발주처, 시공사, 감리단의 이름은 빠짐없이 등장하지만 정작 구조물의 설계자는 의도적으로 누락된 경우가 적지않다.

기술적 핵심을 책임지는 주체가 배제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이번 기획은 건설 준공기념비에서 설계자가 배제되는 현실을 중심으로 그 구조적 원인과 개선 필요성을 진단해 보고자 한다.

▲FIDIC에서는 주역, 현장에선 조연

해당 조항은 건설공사의 안전사고 방지 및 설계자의 법적 지위와 사회적 책임, 공공기여의 투명한 고지를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이 보기 쉬운 곳에 영구적으로 설치해야 한다고 명시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공 인프라의 책임 주체를 명확히 인지하고, 각 전문 분야 기술자의 기여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천사대교 준공기념비에는 설계사 이름이 포함되지 않았으며 기념 구조물에 부착된 동판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관련 시행규칙을 살펴보면 공사명, 공사기간, 발주자, 설계자, 감리자, 시공자, 그리고 현장 배치 기술자의 성명과 자격종목까지 포함하도록 되어 있다.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

다만 현장에서는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국내 유일 해상복합교량인 천사대교와 국내 최대 해저터널인 보령해저터널에도 설계자의 이름은 기념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구조물은 법 개정 이후인 2019년, 2022년 각각 개통했다. 엔지니어링판 노벨상으로 불리는 FIDIC 리워드에서 설계부문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수상했지만 정작 구조물을 설계한 엔지니어의 이름은 자취를 감췄다.

업계는 해당 조항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이유로 점검 체계의 부재와 위반 시 제재 수단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다수의 공사 현장에서 이로 인한 설계자 정보 누락이 반복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준공 이후 설치되는 기념비에 설계사만 누락된다면 이는 건설산업 내 위상에도 부합하지 않고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또 안전사고 예방이나 정보의 투명한 공개라는 법의 취지와도 배치된다.

현장에 나가보면 기념비에는 발주처와 지자체장, 시공사 임원들의 이름은 새겨져 있지만 정작 실제 구조물을 설계한 엔지니어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화장실 옆에 기념비” 토목 위상의 현실

본지는 최근 전국 30개 주요 인프라 프로젝트의 준공기념비를 조사했다. 이 중 36.6%는 설계사가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도로공사나 국토부 산하 지방청 등 주요 발주처가 주관한 사업의 경우 발주처는 상단에 명시하고 감리, 시공사는 반드시 적혀있었다.

보령해저터널 준공기념비를 살펴보면 발주청, 감리, 시공사 명단만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우측 사진은 팔영대교 준공기념비로 야외 화장실 옆에 조성됐다.

서해안고속도로 준공기념비가 대표적 사례다. 기념비를 살펴보면 사업 발주처인 도로공사 관계자 이름만 빼곡했다. 도로공사 사장을 정점으로 본부장, 부장, 과장, 현장감독 등 소속 직원들의 이름이 상세히 적혀있다. 다만 설계사는 빠져있다. 이 다리가 국내 기술 장견간사장교라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의의하게 다가온다.

설계사뿐만 아니라 건설기술 전반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지위가 여전히 낮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익산청이 발주한 팔영대교가 대표적이다.

이 구조물의 준공기념비에는 설계사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위치가 문제였다. 야외 화장실 바로 옆,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설치돼 있었던 것이다. 마치 형식적으로 기념비를 설치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최근에 완공된 구조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앞서 언급한 천사대교와 보령해저터널은 FIDIC으로부터 설계부문 상을 수상했으며 인근에는 별도의 공원까지 조성되어 구조물의 위상을 강조했다. 기념비 역시 단순한 석재가 아니라 크고 웅장하게 조성된 형태였다. 그러나 그 기념비 어디에도 설계자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천사대교 정식 준공기념비로 신안군수와 발주청이 상단에 포함됐고 설계사는 제외됐다.

먼저 천사대교를 살펴보면 발주청 대신 신안군수와 부군수의 이름이 최상단에 표시됐다. 이후 익산청과 감리, 시공사 순으로 이어지며 설계사 정보는 없다.

다만 기념비 옆에 마련된 조그마한 동판에서는 설계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당 동판은 2020년 대한토목학회가 설치한 올해의 구조물 기념판으로 이곳에는 설계를 담당한 기술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는 발주처가 법령에 따라 설치한 공식 기념비가 아닌, 학회가 자체적으로 제작한 비공식 기념판에 불과하다. 즉, 법적 책임이나 공적 기념의 성격과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보령해저터널도 상황은 비슷했다. 국내 엔지니어링 능력으로 수심 80m 아래에 연장 8㎞의 대구경터널을 건설하는 사업으로 전세계 5번째 규모다. 국내 순수기술로 세계수준의 첨단터널을 설계한 것으로 대한민국의 이 성과는 산업계 안팎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이름 없는 기념비=기술 없는 사회

모든 사례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설계자의 기여를 비교적 충실히 기록한 우수 사례도 존재한다. 기념탑을 조성한 새만금방조제와 공항 내 역사관을 마련한 인천국제공항이 꼽힌다.

먼저 새만금방조제의 경우 사업 전 단계를 세분화해 참여자의 명단을 자세히 명기했다. 기념비에는 기본조사, 예비타당성검토, 기본 및 실시설계까지 나와있었다. 다만 농림부 사업은 한국농어촌공사가 설계와 감리를 모두 직접 총괄한 구조였기 때문d[ 순수 설계사를 공로하기 위해 표기한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드론으로 촬영한 천사대교와 보령해저터널 전경

결국 설계자의 이름이 남는 기준이 기여도가 아니라 소속 조직에 좌우되는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인천국제공항 역시 비교적 긍정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공항의 변천사를 소개하는 역사관에는 1단계부터 3단계까지 참여한 설계자 명단이 구체적으로 표기되어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역사관이 많은 이용객이 오가는 제1터미널이 아닌 제2터미널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공시설의 역사와 기술적 기여를 조명하는 공간이라면, 접근성과 대중성을 고려해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되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건설산업기본법 제42조 제2항은 표지판 설치를 명문화하고 있다. 시행규칙에는 공사명, 기간, 발주자, 설계자, 감리자, 시공자, 현장 기술자의 성명과 자격종목까지 포함토록 규정돼 있다.

다만 위반 시 법적 제재가 없어 사실상 권고 수준에 머무른다. 이행 여부를 감시하거나 패널티를 부과한 사례도 찾아보기 어렵다. 규정은 있지만, 실효성은 없는 상태다.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 마련된 역사관 및 기념 조형물

문제는 단순한 미이행이 아니라 의도적 배제라는 거다. 준공기념비가 기술적 공헌을 기리는 목적보다 조직 간 권력 관계와 위계를 반영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설계사는 종종 외주 용역이나 하도급 업체로 취급되며 기념의 대상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된다.

하지만 설계자는 법적으로 가장 강한 책임을 지는 직군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 건설안전특별법 모두 설계 단계의 안전책임을 규정하고 있으며 하자가 발생할 경우 민·형사 책임의 1차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이름은 기념비에 오르지 못한다. 이러한 책임과 공로의 불일치는 건설 산업 내 기술자의 위상을 왜곡시키고, 기술 경시 문화를 더욱 고착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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